쾰른의 금융 패주오펜하임
1834년 아브라함 오펜하임은 로스차일드 가의 창시자인 메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의 손녀인 23세의 샤를로테 베이푸스와 결혼하는 기쁨을 맛봤다. 이후부터 그의 앞길은 그야말로 탄탄대로였다. 부와 권세가 날로 커져 부의 경우 장인과 처삼촌들에 필적하게 됐다. 이들은 프랑크푸르트의 재정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었던 암셸, 오스트리아 금고 열쇠를 쥐고 있던 살로몬, 런던 금융 타운을 좌지우지하던 네이선, 이탈리아 세수를 장악하고 있던 카를, 파리의 은행을 완전히 정복한 제임스 등이었다.천하의 로스차일드 가와 사돈 관계를 맺은 오펜하임 가도 물론 평범한 집안이 아니었다. 유대인 중에서 최고 계급이었던 ‘궁정유대인’에 속했다. 집안의 융성은 1789년 아브라함 오펜하임의 아버지인 살로몬 오펜하임이 겨우 열일곱 살의 나이에 본에서 오펜하임 가 은행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나중에 이 은행은 쾰른으로 기반을 옮겼다. 나이는 어렸으나 아버지를 따라 금융시장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살로몬 오펜하임은 이미 신흥 자산 계급의 재력이 급속도로 확장되는 시대의 조류 속에서 봉건 귀족 세력이 점차적으로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할 것이라는 사실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알아챘다.
사회 주도적인 지위에 있던 세력이 다른 각종 사회 그룹에 대한 통제력을 점차 상실해갈 때 반드시 나타나는 현상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권력 투쟁에 따른 분열 국면이다. 사실 중국 역사에서도 이런 현상은 늘 반복돼왔다. 이를테면 주나라 천자가 힘을 잃으면서 춘추오패시대가 도래한 것 외에 동한 제국의 해체와 이에 따른 삼국의 정립, 진왕조 내부의 분열과 오호의 득세, 당나라의 번진 할거와 오대십국 시대의 도래 등이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왕조들이 통제력을 상실하자 곧바로 권력 진공 상태가 도래한 다음 내외부의 신흥 세력이 급부상하여 사회를 완벽하게 재편한 것이다. 서양 역시 동양과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이윤 추구를 핵심 가치로 삼는 자본주의가 18세기 말엽 유럽 대륙에 날로 세력을 떨침에 따라, 사회 각층을 속박했던 기존의 봉건 귀족 통치와 종교의 신권 세력이 무너져 내린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었다. 쇠락한 사회 전통 권력의 기반은 이처럼 뿌리째 흔들렸다. 대신 금전의 권력이 각종 사회 구조의 틈과 권력이 무너져 내린 폐허에서 빠른 속도로 성장을 구가했다. 이들은 서로 결탁하여 네트워크를 형성한 다음 모든 사회 시스템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나중에는 하늘을 가릴 정도의 발전을 구가하게 되었다.젊고 패기 넘치는 살로몬은 이런 시세를 너무나도 잘 읽었다. 행동 역시 빨랐다. 전통적인 궁정 대출이나 화폐 교환 사업에서 정부 채권의 인수 및 시장간 차익거래등의 신흥 사업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결정은 바로 내려졌다. 이 결정은 당연히 성공으로 연결됐다. 1810년 오펜하임 가 은행의 자산은 100만 프랑에 이르러 일류 은행 가문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야심이 끝이 없었던 살로몬은 이 정도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았다. 곧 로스차일드 가의 성공 모델을 따라 방대한 금융 제국으로 발전하겠다는 기본적인 원칙을 세우고, 이를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사업 수법이 탐욕스럽고 마지노선이 없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 오죽했으면 나중에 사돈이 되는 로스차일드 가에서조차 그를 몹시 부담스러워 했을까? 이 사실은 1814년 3월 18일 로스차일드 가가 암스테르담의 합작 파트너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오펜하임 가의 수법에 대해 경계할 것을 일깨운 내용이다. 우리는 제임스가 있는 그곳(파리의 로스차일드 지점)과 쾰른의 오펜하임 가에서 보낸 자금이 당신들에게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기뻤습니다. 쾰른의 오펜하임 가에서는 우리 사촌형을 통해 다시 일단의 자금을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오펜하임 가에서 보내는 물건에 대해서는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자세하게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대단히 탐욕스러운 사람들입니다. 더구나 매번 규칙을 지키는 것도 아닙니다. 때문에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상한선 없는 주문을 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익은 모두 그 사람들 것이 되고 맙니다. 3 살로몬 오펜하임은 전략적 연맹에 눈을 돌릴 줄도 알았다. 그는 이를 위해 결혼을 통한 인맥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구축하는 노력 역시 잊지 않았다. 1813년 그의 노력은 첫 결실을 맺었다. 고작 열다섯 살에 불과한 자신의 딸을 프랑스 파리의 저명한 유대계 은행 가문인 풀드 가의 아들 베네딕트 풀드에게 시집을 보낸 것이다. 그의 눈은 과연 정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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